본문 바로가기

500년이 반만년을 새기다... 고려, 북진을 꿈꾸다

by 매몰 2018. 2. 10.

고려, 현재 우리가 "코리아"로 불리게된 기원이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고려에 대해서 잘 모르는것이 사실이다.

"태조 왕건"이라는 드라마는 알아도, 고구려의 위상은 알아도,

고려가 어떤 나라였는지는 관심 밖이다.

 

학창시절에 역사와 관련된 교양과목을 들은적이 있었다.

교수님이 우리나라의 왕을 주제로 레포트를 내주셨는데 나는 고려 광종에 대해서 썼다.

그런데 고려 임금을 선택한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며 신기해 하셨다.

 

이렇듯 세계에 이름을 알렸음에도 고려가 푸대접을 받는다는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세상엔 이유없는 결과는 없다. 고려가 우리나라의 이름이 된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외침을 가장 많이 받고도 당당하게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이유!

고려의 500년 전쟁사에서 그 원동력을 찾을 수 있다.

 

 

 

 

 

 

 

 

 

고려시대에 있었던 전란은 크게 4가지다

거란 요나라의 침공, 여진 정벌, 몽골과의 30년 전쟁, 홍건적 침입이 그것이다.

 

여진 정벌만 제외하고는 모두 방어를 하는 입장으로 고려는 방어전에 특히 능했다

 

 

고려의 방어 전술은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번째, 북방의 험준한 지형과 요세를 이용하여 적의 이동속도를 늦춘다

두번째, 바깥의 모든 곡식을 성안으로 가져오거나 불태워버리는 청야입보 전술로 보급을 차단한다

세번째, 적이 한반도 깊숙히 들어오면 중앙에서 대군을 파견해 북방의 요세와 위아래에서 섬멸한다

 

즉, 적은 고려의 북방 요세로 인해 예상외로 시간을 지체한다

그동안 개경에서는 대군을 준비한다.

청야입보로 보급이 시급해진 적군은 회군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이미 너무 깊숙하게 들어왔고 고려 북방의 몇몇 요세는 너무 힘들어 함락하지도 못했다.

후방도 무섭다.

이때, 고려가 고맙게도 화의를 요청한다. 돌아갈 명분이 생겼다. 야호!

하지만 돌아가는 길에 고려의 대군이 후방에서 공격하고 요세에서도 길이 막혀 전멸한다.

 

 

 

 

 

이 전술이 제대로 발휘되었던 전쟁은 거란때였다. 

이때 그 유명한 강감찬의 구주대첩이 있었는데, 강감찬이 이끈 고려의 중앙군이 회군하는 거란군을 섬멸한것이다. 또한, 서희가 앞서 말빨로 얻어낸 강동 6주가 북방 요세로써 역활을 톡톡히 했다.

 

 

거란의 1차 침입
거란의 2차 침입

 

거란의 3차 침입

 

 

 

 

 

 

 

거란은 패배의 충격에 서서히 망해갔고 그 틈에 여진이 성장했다.

 

사실 거란과의 충돌은 북으로 세력을 확장할려는 고려와 후방을 견제하려는 거란의 필연적 사건이었다.

여진 정벌 역시 북방에 대한 고려의 야심이 한몫 했다.

 

국력에 대한 자신감이 없었다면 감행하지 못할 대대적 정복활동이었다.

하지만 결과로만 보면 실패한 정벌이었다. 결국 점령한 땅을 되돌려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성과는 대단했다. 후에 금나라를 세운 여진은 감히 단 한차례도 고려를 침공하지 못했으며, 고려의 세계적 위상은 거란과의 전쟁 이후 또 한차례 업그레이드 되면서 사실상 동북아의 강국이 되었다.

 

 

"해동천하"라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이 시기를 말한다. 

고려는 팔관회라는 불교행사를 성대하게 열었는데, 여기에 중국 송나라 상인을 비롯하여 수많은 외국사람들이 찾아왔다고 한다. 

 

만약 고려가 그저 작디작은 나라였다면, 있을수 없는 일이었다.

다음 사례로 고려의 힘을 유추할 수 있다.

 

중국은 중화사상으로 자신들 외에는 황제를 칭할수 없도록 했다. 그런데 고려가 송과의 외교를 제외하고는 황제로 칭해도 묵인하였다.

 

또한, 송나라로 온 고려 사신들을 제후국이 아닌 형제국 사신으로 대접했다.

송이 북방민족에 밀린 상황이긴 했지만 중국 중심이었던 당시 동북아의 질서로 비추어 보면 파격적인 대우였다.

 

여진 정벌

 

우리는 흔히 여진 정벌이 한반도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알고 있지만, 최근 연구로는 만주까지 포함한 지역이었음이 드러나고 있다.

 

 

 

 

 

몽골이 제국을 건설하고 한반도를 침공할 쯤에는 고려의 상황이 예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권력 쟁탈로 내부가 분열되고 수탈이 지속되면서 농민 봉기도 곳곳에서 발생한다.

더욱이, 무신정변마저 일어나면서 혼란은 가중된다.

 

그래서 몽골과의 전쟁에서는 앞에서 살펴본 방어전술 세번째가 이루어지지 못한다.

1차 침입때를 제외하고는 중앙군 자체가 편성되지 못할 만큼 허약해진 상태였다.

 

사실상 몽골제국을 30년동안 막아낸 것은 그나마 견제했던 북방요세와 일반 백성들의 힘겨운 사투였지 고려 조정이 절대 아니었다. 이런 이유로 민간인의 피해가 무척 컸다

 

경제와 안보가 시급하다면서 정작 아무것도 하지 않고 국민들 짐만 지어주고 떠난 어느 정권과 다를바가 없었다.

 

1231년 침략 (구주성 전투)
1232년 침략 (처인성 전투)

 

1235 ~ 1239년 침략
1253 ~ 1254년 침략

 

삼별초 항쟁

 

고려가 30년을 버티면서 몽골은 어쩔수 없이 특별 대우를 한다. 독립을 유지시킨채 부마국으로 영향력만 행사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고려의 자주성은 크게 추락할 수 밖에 없었다.

 

 

 

 

 

몽골의 온갖 괴롭힘에 힘겨워 하던 고려는 공민왕이 등장하면서 전환점을 맞는다.

잃었던 영토를 되찾고, 몽골 앞잡이들을 몰아내고, 자주성을 빠르게 회복해 나간다.

 

공민왕의 군사 활동

 

 

그런데, 변수가 터지게 된다. 홍건적이다.

 

몽골이 세운 원니라가 망해갈 즈음에 한족이 대규모 농민 반란을 일으킨다. 특히, 붉은 두건을 두룬 세력이 두각을 나타내는데 이들이 홍건적이다.

 

홍건적은 한 국가를 위협할 정도로 막강했다. 하지만 결국 관군의 대대적 공세에 밀려 요동으로 쫒기게 된다. 결국, 차선책으로 고려를 침입한다.

 

고려는 다른때와는 다른 전술로 홍건적을 막아낸다.

홍건적이 생존을 위해 침입한것을 간파하고 청야입보를 하지 않은채 식량과 함께 성을 일단 내준다.

예상대로 홍건적은 거기서 안주했고, 고려는 군사를 정비하여 대대적 탄환작전을 편것이다.

 

한때 공민왕이 남으로 피신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지만 홍건적을 모두 몰아내는데 성공한다.

 

홍건적 침입

 

 

 

 

 

"이길수 없다면 멋지게 져라" 라는 말이 있다.

고려는 항상 승리하지만은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초라한 패배는 없었다. 이것이 고려의 힘이다.

별볼일 없어 보이던 나라가 차례로 대군을 막아내는 모습은 감히 건드릴수 없는 존재로 만들었고, 선망의 대상까지 되었다. 

 

위기속에서도 고려는 벽란도를 넘어 세계 곳곳으로 뻗어나가 우리의 이름을 새겼다.

 

그저 벽란도에서 무역이 활발해 외국 상인들이 왔다. 그래서 알려졌다가 아니다.

막강한 군사력과 위기관리 능력이 함께 만들어낸 걸작품이었다.

 

고려는 우리의 이름이 되기에 충분하다.

 

 

 

 

 

도움이 되셨다면~ 정성으로 빚은 저희 앱!  많은 이용 바래요:)

 

https://meorimal.com/index.html?tab=spaceship

 

우주선 - 방치형 인공지능 투자 체험기

미리 맛보는 인공지능 투자!

(주)머리말 meorimal.com

 

https://meorimal.com/subway.html

 

지하철어디있니

더이상 고민하지 마세요. 뛸지 말지 딱 보면 알죠.

(주)머리말 meorimal.com

 

사업자 정보 표시
주식회사 머리말 | 고영진 | 서울특별시 송파구 중대로 135 서관 10층 (가락동, 아이티벤처타워) | 사업자 등록번호 : 524-88-00727 | TEL : 010-9990-3674 | Mail : gyjmeba@hanmail.net | 통신판매신고번호 : 2017-서울강남-03941호 | 사이버몰의 이용약관 바로가기